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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홍세화 별세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홍세화 별세

2024년 4월 18일

 

남민전 사건 연루돼 장기간 프랑스 망명객

빈곤층 위한 장발장은행 설립

제주해군기지 백지화 촉구 기자회견 하는 홍세화(2012.2.6) [연합뉴스 자료사진]
한불통신) 망명 생활의 경험을 담은 저서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로 한국 사회의 변화를 촉구한 홍세화 장발장은행장이 18일 오전 별세했다. 향년 77세.

 

장발장은행과 지인 등에 따르면 홍 은행장은 이날 서울 중랑구 녹색병원에서 유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생을 마감했다.

그는 작년 2월 전립선암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이었다.

 

서울 출생인 홍 은행장은 경기고를 졸업한 뒤 서울대 금속공학과를 다니다 자퇴했다.

같은 대학교 외교학과에 다시 입학했으나 1972년 민주수호선언문 사건으로 제적됐다가 복학하는 등 우여곡절을 거쳐 1977년 졸업했다.

 

이후 무역회사에 취업해 유럽 주재원으로 일하던 중 이른바 ‘남민전 사건’에 연루돼 장기간 프랑스 파리에서 망명 생활을 하며 택시 운전이나 관광객 안내 등을 했다.

 

남민전 사건은 민족일보 기자로 활동한 이재문 등이 1976년 결성한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라는 지하 조직이 유신 체제를 비판하는 유인물 등을 배포한 것을 공안 기관이 문제 삼으면서 80여명이 체포된 사건이다.

처벌받았던 이들 중 일부는 2006년에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다. 남민전 사건에 연루됐던 홍세화는 1979년 당국이 수사 결과를 발표하자 귀국할 수 없는 처지가 됐다.

 

그는 당시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전적 에세이 1995년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창작과비평사)를 출간해 ‘톨레랑스'(관용)라는 개념을 제시하며 한국 사회의 변화와 성찰을 촉구했다.

 

당시 홍세화는 파리에 머물고 있어서 출판 기념회는 저자가 불참한 가운데 열렸지만, 책이 곧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는 등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99년 6월 망명 약 20년 만에 일시 귀국한 홍세화는 당시 서울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도시 전체가 인간적 정감을 놓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철학만 가졌다면 한강을 파리의 세느강보다 더 크고 아름답게 가꿀 수 있었을 텐데…”라고 아쉬움을 표명하고 박정희 정권의 성장 우선주의를 비판하기도 했다.

일시 귀국하며 소감 밝히는 홍세화(1996.6.14)[연합뉴스 자료사진]
2002년 완전히 귀국해 한겨레신문 편집국 기획위원을 맡는 등 활발하게 저술·논평을 하며 톨레랑스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 시위나 공무원 노조 탄압 반대 시위를 하고 제주 해군 기지 백지화를 요구하는 등 활발하게 정치적 의사 표명을 했다.

2011년 진보신당 대표로 선출돼 다음 해까지 당을 이끌었다.

 

2015년에는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형편이 안 돼 노역할 위기에 놓인 이들에게 최고 300만원을 빌려주는 ‘장발장은행’을 설립해 은행장으로 활동해왔다.

 

그가 남긴 저서로는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1999), ‘아웃사이더를 위하여'(2000),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2002), ‘불가사리'(2003), ‘빨간 신호등'(2003), ‘미안함에 대하여'(2020), ‘능력주의와 불평등'(2020) 등이 았다. (서울=연합뉴스) 이세원 최원정 기자 = sewonle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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