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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 지난 한국전쟁: 파리에서 상흔과 화해(인터뷰)

La Guerre de Corée 70 ans après : cicatrices et réconciliation à Paris (Interview)

 

1950년 한국 전쟁이 나던 해에 태어난 재불교민의 이야기다.

그녀의 이름은 변정원, 서울 북촌에서 출생하여 1972년 이화여대 졸업, 1974년 프랑스 정부 장학생으로 파리에서 공부했다.

파리 국립국제행정대학원IIAP Institut International d’Administration Publique 에서 한국 여성 최초로 디플롬 받았다.

여러 장편의 번역 작을 출판했다.

 

그녀는 한불통신에 두가지 다르면서 같은 한국전쟁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하나는 자신의 큰 오빠이며 장남이 한 쪽 다리를 절단한 상이군인이 되어 집으로 돌아오면서 생긴 집안이야기다.

다른 하나는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으면서 한국전에 참전했던 이웃을 만나면서 알게 된 참전용사 이야기다.

 

그녀의 큰 오빠는 한국전쟁에서 훌륭한 영웅이다. 소련제 탱크 8대를 육탄으로 격파를 했다.

그 당시 소련탱크는 한국군에 있어 공포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변규영 중령(당시 소위) 소대원들과 선두탱크를 격파하고 지형때문에 밀려 있는 나머지 전차를

차례로 탱크궤도를 끊어 놓고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탱크병들은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고 그들을 포로로 잡을 수 있었다.

이 전설 같은 실화는 경북 화수 신령지구 6사단이 부산을 향한 남침을 막을 수 있는 큰 동기를 부여했다.

뿐만 아니라 탱크를 잡을 수 있다는 ‘용기를 한국군에게 모범을 보여 게임 체인저 역할을 했다. (위키백과 사전 참고)

하지만 변 중령은 다리를 관통하는 총상을 입어 목발을 짚는 상이군인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다.

그녀 집안은 웃음이 사라진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장남으로서 상인군인이 된 스트레스, 전쟁에서 죽음에 맞닿은 그 기억들, 가족과 주변의 시선들은 살아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감내해야 하는 몫이 되었다고 말한다.

부상당한 변중령에게 여름은 매우 어려운 고통스러운 계절이었다고 회상한다.

그가 한쪽 다리로 힘들어 할 때 그녀의 어린 마음은 큰 오빠를 싫어했다고 고백한다.

전쟁영웅이 아니라 온 가족의 고통과 쓰라린 아픔이었다고 말한다.

« 집안에 전쟁 영웅이 있으면 뭐하나 누가 알아주지도 않고 애국자 집안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어떤 의미가 있는가 »

원망스런 한 맺친 혼자 말은 그녀의 주변을 떠나지 않았다.

장애인이 된 큰오빠와 그녀 사이의 대화 소통의 골은 갈수록 깊어 졌다. 그럴수록 화해를 할 수 있었던 시간과 기회는 없었다.

파리 유학으로 인한 거리도 있었지만 한불가정을 이룬 그녀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녀는 오빠를 영영 떠나 보내고 70년이 지나서야 오빠와 진정한 화해를 하고 싶다고 말한다.

지난 주 금요일 23일 파리 4구 Pont-Marie 광장 6,25기념비에서 진솔한 마음을 전했다.

사죄와 화해하는 마음으로 한국전쟁 영웅 변규영 중령의 승전기념비를 찾아가고 싶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말하는 외국인이 되어버린 그녀는 그곳이 어디인지 모른다고 한다.

70년 지난 한국전쟁: 파리에서 상흔과 화해(인터뷰)  최재철주불대한민국대사와 변정원 선생, 2023년 6월 23일 파리 6.25 기념식에서 @한불통신

 

변정원 선생이 겪은 또다른 6.25 이야기가 있다.

파리에서 같은 아파트 건물에서 살던 프랑스 국적 André Renaud씨 이야기다.

그는 젊은 나이에 자원병으로 UN 프랑스 군에 입대한다.

 

젊은 나이 만큼이나 부모의 서명을 받아야 했다.

그의 부친은 찬성을 했지만, 모친이 극구 반대했다고 한다.  결국 부모를 겨우 설득하여 서명을 받고 부산항에 3400여명의 힌 전투병으로 참전한다.

그는 해외 여행이라고는 한국이 처음이었다고 한다.

그의 첫 만남은 매우 인상적이었고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는 아시아 인 변정원 선생을 처음보자 어디서 왔는지를 물었다.

한국이라고 했더니 앙드레씨는 한국에 가보았다고 얼핏 한마디 하면서도 반가움보다는 고개를 숙이며 눈을 피했다.

어쩌다가 한 건물에서 스치는 경우가 있어도 끝내 멀리하며 짧은 ‘봉주르’ 인사도 안했다.

얼마 후 그의 부인 자크린 Jacquline 의 증언을 들어보니 앙드레는 부인과 가족에게 한국관련 어떤 말도 하지 않았고 일체 질문도

못하게 말을 막았다고 한다.

알콜 중독자가 되어 건물이 울릴 정도로 부인에게 고함을 질렀다. 얼마후 부인이 견디지 못해 집을 나가 친척집에 갔으며 앙드레를 혼자 살게 방치를 했다.

어느 날 자동차 사고를 입어 병원에 입원했다기에 부인 승인를 받고 여러차례 병문안을 갔다.

그는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방문해주어 고맙다고 눈을 지긋이 감으며 소리 없는 미소를 지었지만 끝내 한국관련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변선생 역시 앙드레에게 어떤 질문도 안했다고 한다.

생전에 여러차례 참전용사 협회에 함께 참석하자고 제안했으나 완강히 거절했다. 그 이유는 지금도 모른다.

앙드레가 고인이 된 이후 부인 자크린이 앙드레가 간직한 한국관련 유물을 내가 원하면 주겠다고 하여 받았다.

한국전쟁 때 전우들과 찍은 사진, 그 당시 군대에서 사용하던 돈, 랜션급식 카드, 불어로 출판한 한국전쟁 저서, 왠만한 유물은 완전히 없애버렸다고 한다.

너무 어린 나이에 쫄병으로 전투에 나가 그 사선과 죽음들 사이를 지났을 것이다.

또 셀수 없는 총질은 살기위한 정당방위로 위로했지만 결국 트라우마 피해망상으로 정신적인 파괴로 남는다.

파리에서 한국인을 같은 건물 안에서 다시 만난 후에 온갖 트라우마가 되살아 났을 수도 있겠다고 짐작했다.

자크린 부인도 고인이 되었다. 장례식에 참석하여 측은지심으로 두 부부의 명복을 빌었다.

한국전쟁 참전용사와 좋은 인연을 만들어 주기에 너무나 큰 비극으로 기억에 남았다고 말한다.

파리 4구에서 열린 6.25 기념식에서 플랜카드는 “참전용사 여러분의 헌신과 희생을 잊지 않겠습니다” 문구가 한글과 불어로 표기되어 있다.  @한불통신-ACPP

주불 한국 대사관에서도 6.25행사에서 “프랑스 참전용사의 희생과 헌신은 잊지 않겠다”고 플랜카드를 만들어 기념한다.

프랑스 참전용사 협회 모임과 행사에 참석하면 프랑스 회원들은 우리들보다 당신 이야말로 대한민국 애국자 집안이라고 격려하며 연대감과 자긍심을 준다고 말한다.

또 그들과 인연이 조그만 위안이 되었다고 밝힌다.

그녀는 사실 전쟁은 그녀의 인생에서 오랫동안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고 회고한다.

지금도 우크라-러시아 전쟁이 그녀 주변에 따라다니는 것처럼 말이다.

그녀는 말한다. 전쟁은 아무 쓸모없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알지만 그 전쟁은 항상 주변에 따라다닌다.

그리고 사람들은 또 말한다.  전쟁은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남유럽협의회가 정전 70주년을 맞아 15일(현지시간) 파리 주프랑스 한국문화원에서 1953~1954년 한국전쟁에 참전한 앙드레 다차리 씨가 서울 등에서 촬영한 사진을 공개한다고 밝혔다. 사진은 앙드레 다차리 씨가 촬영한 어린 남자아이를 안고 있는 여성 사진. 2023.6.15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남유럽협의회 제공. 앙드레 다차리 @한불통신-ACPP

#파리에서 6.25 전쟁, #변정원, #최재철대사, #변규영중령, #André Renau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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